기억에 대한 퍼즐, 메멘토와 거미숲
성실한 관람객의
성실한 영화해석
거미숲은
‘한 남자’의 내면과 자의식에 관한 영화다.
영화적 기교를 제외하고 내용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유령이 나온다는 숲, 거미숲에 관한 제보를
받고 취재를 떠난 <미스터리 극장> PD 강민은 애인과 방송국 상사가 살해되는 끔찍한 살인사건을
목격한다. 14일만에 기억상실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친구 최형사와 함께 거미숲의 제보자 민수인을
찾아 사건의 진실과 범인을 추적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나’에 의해 ‘왜곡된 기억=환각’이다.
잃어버린 14일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기억상실의 14일간 그가 만들어낸 왜곡된 기억=환각이 바로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잃어버린
14일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살인사건의 목격자가 아니라 범인이다. 어린시절 기억
속의 부정한 여인은 친구의 엄마가 아니라 나의 엄마다. 병원 옆침대에 있던 환자는 노인이 아니라
아이이다. 심지어 제보자 민수인과 친구 최형사는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다. 환각 속에서 나를 지켜보던
남자와 전화 속의 목소리는 모두 또다른 나, 바로 현실의 나인 것이다.
'나’는 어째서 2가지 다른 기억과 다른 자아를 가지게 된 것인가?
서로 다른 2가지 기억 속에 2개의 자아가 존재하고, 이들은 서로 충돌하며 갈등한다. ‘왜곡된
기억’을 설명하는 비밀의 열쇠는 ‘어린시절 어두운 비밀=기억’이다. 그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나는 과거와 유사한 상황에서 살인을 하게 된다. 현실의 살인자인 나는 환각 속에서는 목격자로서
자기합리화의 기자재를 만들고 이것이 왜곡된 기억과 왜곡된 자아로 표현된다.
기억 속의 진실은 허구=환각이며, 진실은 다른 곳에 존재한다.
결국 기억상실의 14일간은 살인자인 내가 만들어낸 ‘자기합리화의 환각’이고, 진실이라고 믿었던
사실은 허구이며, 진실은 다른 곳에 존재한다. 마지막이 다시 처음으로 연결되는 ‘거미숲’은 현실과
환각 사이를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하고 있다. 거미숲은 살인사건이 일어난 현장이자, 나의 엉클어진
기억의 실타래와 그 뭉치이며, 어둡고 비밀스런 유년의 기억을 상징한다. // 여기까지가 성실한
관람객의 성실한 영화해석이다.
영상이 말하고 있는 바에 의한 정직한 영화해석
그러나 영화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
실제 영화는 이렇게도 볼수 있다.‘살인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살인자였다. 어린시절
어머니의 부정을 지켜본 어두운 기억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감독은 사람의 기억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영화는 참 어설퍼 보인다. 같은 영상, 같은 내용에
대해서도 이렇게 다르게 말할 수 있다. 앞의 영화해석과 뒤의 것 중에 무엇이 더 진실에 가까운가,
무엇이 더 영상(거미숲)에 가까운가?
‘꿈보다 해몽’ … 어설픈 영상에 경계할 ‘의미과잉’
해석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나, 나는 뒤의 해석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의도에
충실히 (과잉)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감독’이 아니라, ‘영상’이 무엇을 말하는가이다.
‘영상’은 이 이상을 말하고 있지 않다. 1. 내가 목격자가 아니라 살인자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예상가능한 것이므로 반전이 아니다. 2. 모든 것의 출발이 되는 ‘어두운 유년’도 사실 따지고
보면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다. 3. ‘기억은 불완전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감독이 이주제를 살리고 싶었다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안일하다. 이것은 이미 상식이다.
단서가 단서로서 긴장감을 잃고, 퍼즐이 퍼즐로서 흥미를 잃어버릴 때 ‘미스터리 스릴러’로서의
연출력조차 회의하게 만든다.
기억에 대한 놀라운 발상,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
‘거미숲’과 ‘메멘토’는 모두 기억과 진실에 대한 영화이다. 그러나 기억을 다루고 접근하는 방식은
정말 다르다. 메멘토는 10분이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자 ‘나’를 컨셉으로 기억이
사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사실의 단순한 옮김=기록’조차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어떻게 진실에 접근있나를 묻고 있는 아주 놀랍고 유니크한 영화다. 심리스릴러의
장르나 주제에 관해서라면 송일권감독은 기억/확신/믿음과 사실/진실 사이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메멘토’와 ‘인썸니아’에서 배워야 한다. 감독은 ‘거미숲’을 만들면서 “더 많은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 더 많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야기부터 다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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