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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The Pianist

" 영혼을 움직이는 감동의 선율 "

2002년, 네덜란드/독일/영국/폴란드/프랑스, 휴먼드라마, 148분

감 독 : 로만 폴란스키 l 각 본 : 로날드 하워드
제 작 : 로만 폴란스키, 로버트 벤무사, 알랜 사드
공동제작 : 진 구토브스키
제작총지휘 : 류 라윈, 헤닝 몰펜터, 티모시 버릴
촬 영 : 파웰 에델만 l 편 집 : 허브 드 루즈 l 음 악 : 보체크 카일라
프로덕션 디자인 : 알란 스타스키 l 의상 디자인 : 안나 셰퍼드

출 연 : 애드리언 브로디, 토마스 크레슈만, 프랭크 핀레이, 모린 립맨, 에드 스토파드, 제시카 케이트 메이어, 줄리아 라이너, 에밀리아 팍스, 루쓰 플렛

2015년 6월 18일(목) 재개봉 l 관람등급 : 12세 관람가
수 입 : 조이앤컨텐츠그룹 l 배 급 : 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예고편
국내 홈페이지 미정

- 제75회 아카데미영화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수상
- 2002년 칸느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피아니스트> 전 세계를 울린 생애 최고의 감동! 6월 18일 전국 CGV 리마스터링 재개봉!
 

역사상 전쟁을 다룬 영화 중 가장 위대하다고 칭송 받는 영화 두 편 <피아니스트>(2002)와 <지옥의 묵시록>(1979)이 오는 6월 18일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전국 CGV에서 재개봉한다. 최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말할 수 없는 비밀> 등 명작들의 리마스터링 버전의 재개봉작들이 연달아 성공하여 더욱 기대와 관심을 받고 있다.

두 영화는 개봉 당시 전 세계를 흔들며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고 최고의 명예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와 칸영화제를 석권하였다. 아메리칸 뉴시네마를 이끈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시리즈에 이어 그의 천재성과 광기가 정점을 찍은 <지옥의 묵시록>. 극적인 실화를 완벽하게 각색하여 실제보다 더 사실적인 묘사를 가능케 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는 서로 다른 시대의 전쟁을 다루지만, 당시 믿을 수 없는 제작비와 제작진이 투여된 블록버스터였으며 연출이 CG에 의존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전장을 재현하였다는 사실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애드리언 브로디 주연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독일 시대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사건을 영화화했다. 영화의 실재인물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회고록을 각색한 것이 화제가 되었으며, 로만 감독의 열정과 천재성뿐만 아니라 실제 유대계 폴란드 부모를 수용소에서 잃고 유대인 게토를 탈출한 그의 어두운 과거와 죽음의 공포를 드러내었다는 것 역시 찬사를 받았다.

수용소 50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20여 명만이 살아남았던 죽음의 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피아니스트의 공포와 광기에 맞선 처절한 생존을 그린 감동 실화극 <피아니스트>. 총 제작비 3천5백만 달러, 제작진 1,300명, 거대한 군사장비! 전 유럽대륙의 최고 스텝과 노련한 기술이 완성한 <피아니스트>는 제5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제32회 아카데미의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으로 3관왕을 차지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60개의 부분 수상, 54개의 부문 노미네이트라는 명예로운 기록을 세운다.

2015년 6월 18일, 생에 최고의 영화인 <피아니스트>는 보다 더 또렷하고 선명해진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한다. 2002년 전 세계를 전율시킨 감동을 전국 CGV를 통해 다시 한 번 선사할 예정이다. (2015.06.09)

코리아필름 편집부


영혼을 움직이는 선율! 전 세계를 울린 감동 실화극!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 유명한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하다 폭격을 당한다. 이후 유태인인 스필만과 가족들은 게토에서 생활하지만, 결국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된다.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보내고 간신히 목숨을 구한 스필만은 허기와 추위, 고독과 공포 속에서 마지막까지 생존을 지켜나간다. 나치의 세력이 확장될 수록 자신을 도와주던 몇몇의 사람마저 떠나자 완전히 혼자가 되어 자신만의 은신처에서 끈질기게 생존을 유지하는 스필만. 어둠과 추위로 가득한 폐건물 속에서 은신생활 중 스필만은 우연찮게 순찰을 돌던 독일 장교에게 발각되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주가 될 지도 모르는 순간, 온 영혼을 손끝에 실어 연주를 시작하는데….


눈물에 찬 기립박수, 거대한 감동의 선율 2002 칸느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다!
 

칸느영화제 폐막 이틀 전 5월 24일, <피아니스트>의 첫 공식시사회장은 격렬한 기립박수로 가득 찼다. 영화 크레딧이 끝난 후에도 관객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틀 뒤, 폐막식에서 <피아니스트>가 다른 후보작을 물리치고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발표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이 가슴 벅찬 휴먼드라마의 승리에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을 다룬 <피아니스트>는 유대계 폴란드인이자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는 39년부터 45년까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유대인 강제거주지역)에서 공포와 광기에 맞서 생존을 위한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수많은 죽음의 위험 속에서 스필만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으로 가까스로 살아나고 이 극적인 경험은 낙관적인 희망으로 물든다. <피아니스트>는 죽은 들판에서 승리한 한 예술가의 삶이자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용기있는 자들의 삶이다.


<쉰들러 리스트>연출을 거부했던 로만 폴란스키 그가 20년 동안 기다려왔던 생애최고의 역작을 완성시켰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실존했던 한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삶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자전적 경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대계 폴란드 감독 로만 폴란스키는 유년 시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현장에 있었다. 어머니를 가스실에서 잃은 폴란스키는 반드시 그 시기에 대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 때문에 <쉰들러 리스트>의 연출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이 감성적인 이야기를 연출하기엔 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폴란스키는 스필만의 담담한, 그리고 마치 보고서 같은 회고록을 발견하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평생을 기다렸던 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폴란스키는 <피아니스트>를 자신의 개인적 감상주의나 신파로 물들이지 않았다. 냉정하리만치 담담한 시선으로 역사와 광기, 예술과 인간애를 그려낸 이 영화는 어느 순간, 복받쳐 오르는 감동을 선사한다. 폴란스키는 영화를 통해 비극의 아픔이 아닌 승리와 꿈의 희열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공포와 폐허로 얼룩진 폴란드 바르샤바
독일에서 그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 되살아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전역은 폐허 그 자체였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 <피아니스트>의 제작진들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바로 그 폐허를 재현해내는 것이다. 제작진은 영화배경을 최대한 살려내기 위해 수개월 이상을 사전준비에 힘썼다. 제작진은 베를린에서 90킬로 정도 떨어진 주터보그와 베를린의 바벨스버그 스튜디오, 크게 이 두 곳에서 촬영을 진행하였다. 영화의 배경이 전시였던 만큼, 수많은 장비와 연기자들은 필수였다.

<쉰들러 리스트>로 오스카를 거머쥔 프로덕션 디자이너 알란 스타스키와 그의 미술팀은 바르샤바 현지를 돌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당시의 물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준비했다. 그리고 스튜디오에 완벽한 바르샤바를 재현해내었다. 그곳에서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국에서 미국까지 이어진 주연캐스팅
마침내 폴란스키를 사로잡은 피아니스트를 발견하다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폴란스키 감독은 주연 배우를 찾기 위해 유럽에서 미국까지 샅샅이 다녔다. 그는 스필만과 외모적인 흡사함이 아닌 이미지의 일체를 가져다주는 배우를 원했다. 영국에서의 대규모 오디션도 폴란스키에게 만족스런 배우를 가져다주지 못했으나 미국까지 배우영역을 확장시킨 폴란스키는 마침내 애드리언 브로디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빵과 장미><씬 레드 라인>에서 연기력을 펼친 브로디는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전시의 공포에서 살아남는 폴란드 예술가 스필만의 감정을 세심하게 연기해내었다.

한편, 폴란스키는 주연뿐만 아니라 잠깐 스치는 보조연기자에도 완벽함을 원했다. 그는 반세기 전 폴란드, 유대인, 독일인들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보조연기자들을 수 천명의 인터뷰와 사진촬영 등을 통해 캐스팅하였다. 특히 독일나치군을 연기한 배우들은 감독조차 다시 한번 유년시절의 공포를 경험하게 할만큼 섬뜩한 분위기를 던져내었다.


지옥에서 울려 퍼지는 천상의 소리
천재 피아니스트 스필만의 선율을 만난다
 

영화 속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 바로 스필만이 독일장교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다. 추위와 허기에 지친 유대인이 생존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제작진들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한 사람은 바로 자누스 올레니작이다. 그는 스필만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폴란드 피아니스트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피아노 선율에 혼을 담아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는 위의 장면이외에도 영화의 첫 부분과 라스트를 이루는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였다.


총 제작비 $35,000,000 제작진 1300명, 거대한 군사장비
전 유럽대륙의 최고 스텝과 기술이 완성시킨 대서사시
 

<피아니스트>는 거대한 스케일과 완벽한 역사현장의 재현을 자랑하는, 근래 보기 드문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역사상 거대했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독일, 폴란드, 영국 등 전 유럽대륙의 노련한 노하우와 장인정신이 완성시킨 대서사시이다. 총 제작비 3천5백만달러(약 420억원), 1천명이 넘는 스텝과 연기자, 그리고 엄청난 크기의 촬영세트가 이 영화를 위해 준비되었다. <쉰들러 리스트>로 오스카를 수상한 세계적 프로덕션 디자이너 알란 스타스키는 수개월의 사전조사와 준비를 통해 1930~40년대의 유럽을 21세기에 다시 세웠다.

그러나 만약 <피아니스트>가 단지 대작 영화의 장점만을 지녔다면 유사한 다른 영화가 주는 오락적 재미만을 선사했을지 모른다. 이 영화는 CG나 얄팍한 영상스타일을 배제하였다. 감독 폴란스키는 거짓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영화가 아닌, 제작부터 진솔한 인간의 땀을 사용함으로써 강요된 감동이 아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격정적인 눈물을 이끌어내고자 했고 그것은 성공했다.


20세기 인류역사에 남겨진 상흔 홀로코스트,
그 영원한 아픔이 승리의 희망으로 극복되다!
 

인류사 최대의 비극으로 기억되고 있는 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지휘하는 독일군이 폴란드 바르샤바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6년 동안 지속된다.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역시 이 시기에 일어났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45년까지 유대인들은 잔인함과 폭력 앞에서 사라져갔다. 당시 유럽에 살던 유대인의 80%인 575만 명이 사망한 이 사건은 인류의 사회 문화에 걸쳐 깊은 영향과 상처를 남겼다.

잊을 수 없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영화에서 많이 다뤄지는 소재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한 개인의 영웅적 승리가 주는 휴먼드라마였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명한 예술가에서 처절한 한 인간으로, 그리고 마침내 살아남아 다시 피아노 앞에 선 이 남자의 삶은 인간의 가장 진솔한 드라마이자 가장 극적인 엑스터시를 남긴 특별한 영웅담이다.


HISTORICAL BACKGROUND : 바르샤바 유대인거주지역 (The Warsaw Ghetto)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독일 나치의 첫 번째 목표지역 중 하나는 바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였다. 바르샤바는 독일의 민족적, 경제적, 기타 다양한 이유로 시작한 전쟁에 있어 중요한 요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바르샤바에 집중적인 공중폭격을 가한 뒤 1939년 9월 16일, 전면적으로 이 도시를 침공했다. 스테판 스타진스키 시장과 줄리앙 롬멜과 같은 인사들을 필두로 용감한 저항이 시도되었으나 독일은 그들의 전력과 수력공급로를 차단했다. 결국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는 대가로 저항을 포기해야만 했다.

독일군은 10월 1일 도시를 완전 점령했다. 12일에 히틀러 정권은 철조망으로 403 헥타르의 게토지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16일, 독일군은 도시 인구의 30%가까이 되는 36만 명의 유대인들을 이 지역에 강제거주시키기에 이른다. 점차 더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보내지고 곧 50만 명이 넘게된다. 10만 명의 유대인은 이곳에서 기아와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마침내 도시의 모든 유대인은 이 강제거주지로 몰린다. 그들은 파란별이 그려진 흰색완장을 반드시 착용해야했다. 또한 노역을 당해야했고 식량은 아주 조금씩 배급되었다. 나치군은 자기 기분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처럼 공포에 휩싸인 환경 속에서도 강제거주지역, 즉 게토지역 주민들은 그들의 삶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게토 내에서 그들은 학교를 다녔고 정치적 활동도 조심스레 진행되었다. 1942년 7월, 8월에 거대한 이송이 시작되었다. 31만명에 가까운 게토의 유대인들은 트럭 혹은 배로 이동, 대부분이 트레블링카 실험 캠프로 옮겨졌다.

1943년 3월, 히틀러는 남아있는 유대인 처형을 위해 나치군을 보냈다. 같은 해 4월, 나치의 학살계획이 확실해지면서 처형당하는 자들은 급속히 늘어났다. 게토 지역은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 사회주의자이자 시오니스트운동의 지도자 모데하이 아닐레빅이 이끈 폭동에 4만 명의 유대인이 참가했다. 그들 중 무장된 이들은 단지 200명뿐이었다. 이 처참한 전투는 계속되었다. 5월 16일까지 거의 한달 동안 주민들은 탱크와 화력을 앞세운 독일군에 강력하게 대항하였다. 이 싸움은 폴란드 저항군이나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의 도움 없이 진행되었다. 이 전투에서 7천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고 3만 명의 생존자는 강제 이송되었다.

독일이 바르샤바를 포기한 1945년 1월,
이 도시에 살아남은 유대인은 불과 20여 명뿐이었다.


THE PIANIST-Wladyslaw Szpilman
 

1911년 폴란드 소스노빅에서 탄생. 어려서부터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인 죠셉 스미도비크와 알렉산더 미칼롭스키와 함께 피아노를 배웠다.

1931년 스필만은 베를린으로 떠나 레오니드 크루저의 지도하에 음악아카데미에서 음악공부를 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피아노소곡 '기계의 인생'을 비롯 수많은 피아노 연주곡을 작곡했다. 이 곡들은 그의 고국 폴란드에 커다란 영예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급속도로 인정받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1935년 스필만은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국영라디오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한다.

1939년 9월, 그가 피아노 연주를 하던 방송국이 독일군의 폭격을 맞는다.
이때부터 그는 6년 동안 전쟁의 공포 속에서 피난생활을 지속하다가 기적처럼 독일장교의 도움으로 대학살에서 살아남는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스필만이 6년 전 중단했던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하면서 폴란드 국영라디오 방송은 다시 시작된다.

1946년, 자신의 경험을 쓴 회고록 <죽음의 도시>를 출판하지만 공산정권에 의해 판금 당한다.

그는 다시 음악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유럽과 미국전역을 걸쳐 콘서트를 열었다. 그가 작곡한 수많은 곡들은 폴란드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또한 1950년대부터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1955년에 폴란드 작곡가 협회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1961년 폴란드 대중음악가 연맹을 위해 소폿에서 국제음악제를 개최한 스필만은 1964년 폴란드 작곡가협회의 멤버로 선출된다.

1998년 한번도 아버지로부터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그의 아들 안드레이는 아버지의 회고록을 발견하고 이를 전세계에 공개한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성공을 거두며 라는 제명으로 전세계에 번역, 출판된다.

스필만의 책은 유대인거주지역에서 일어난 생생하고 역동적인 삶의 보고서이자 그 자신의 경이로운 탈출과 생존에 관한 보고서이다. 강렬한 주제의식, 입체감 넘치는 인물들과 감정들로 가득 찬 이 책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게 커다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로만 폴란스키는 책을 읽기 전 스필만과 두 번의 만남을 가졌고 2000년 초, 세 번째 만났을 때 그에게 책의 영화화를 이야기했다. 스필만은 같은 민족이 자신의 회고록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에 대해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영화가 촬영되기 전 2000년 7월 6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