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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시절, 한 남자의 삶이 시작된다.
한국의 거장 감독 임권택 감독의 99번째
작품 <하류인생>은 보릿고개를 넘어 유신시대를 살았던 감독의 거친 시각을 확연히 드러내주는 영화이다.
그래서인지 70년대의 부조리한 정치사건의 단면을 그리고 있는 <효자동 이발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노장감독의 롱테이크 액션이 볼만하다. <취화선>으로 2002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과, 그의 영원한 동지 이태원사장, 정일성 촬영감독이 함께 했다. 때로는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로 흥행 정상에 올랐고, 때로는 <춘향뎐>과 <취화선>으로 한국적 영화미학을
알리는데 안간힘을 썼던 그들이기에, 이제는 그들만의 속내가 담긴 영화 한 편이 관객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요구하고 있다.
태웅의 하류인생
역사적 사건을 영상으로 표현했던 대부분의 작품들은 실화같은 진실, 시대적 유머, 진한 감동으로
관객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잊혀져 가는 역사를 통해 다양한 세대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큰 몫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영화에는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 <실미도>,
기술적 장치와 픽션을 잘 표현해준 <태극기 휘날리며> 그리고 눈물나는 부성애를 드라마틱하게 느끼게
해주는 <효자동 이발사>가 있다. 여기에 <하류인생>도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지만 한 남자의
지친 삶의 모습을 통해 역사의 이면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하류인생>은 1950년대 후반 자유당 말기의 혼란기부터 1970년대초 유신체제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세상을 부딪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남자 최태웅(조승우)과 엄마처럼, 누나처럼, 태웅을
지키는 박혜옥(김민선)이 있다. 암울한 시대에서 살아남고자 건달에서 영화제작업자, 군납로비활동으로
종횡무진 뛰는 모습을 카메라가 숨 가쁘게 담아내고 있다. 그들에게 나라를 위해 국민으로서 신념이
필요하다며 주장하는 혜옥의 동생 박승문(유하준)와 기회만 있으면 역사의 흐름에 발맞추어 사는
것이라며 말하는 오상필(김학준)사이에서 태웅은 강렬하게 대항한다. 그러나 남에 밑에서 일하지
않겠다는 태웅의 굳은 결심도 무너지고 상류인생의 꼭두각시 길을 택하게 된다.
영화 속 태웅의 모습은 현실의 우리들과 다를 바가 없다. 정치적·사회적 혼란기를 살아가면서
권력을 쥔 자들에게 기생하는 모습과 그들끼리 서로를 철저히 이용하며, 이용당하는 모습에서 황폐감을
느끼게 해준다.
임 감독의 하류인생
영화는 감독의 속내를 통해 시대적 암담함과 해학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극중여배우가 테러에
가까운 영화사 제작부의 강권에 못 이겨 더 이상 <애꾸눈박>이라는 영화를 못 찍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있다. 9편이나 동시 촬영했던 유명 여배우가 버린 이 <애꾸눈 박>은 바로 임 감독의
1970년도 작품이다. 영화 속에 은근 슬쩍 자신의 영화사적 이야기를 집어넣은 에피소드들이 미소를
띠게 한다. 이렇게 볼 때 <하류인생>은 깡으로 사는 3류 건달 태웅을 통해 감독의 지나온 삶을
한 폭의 자서전처럼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는 참담한 역사 속에서 삶을 향해 달려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자막과 영상으로 슬쩍
보여주기에 바쁘며, 시대적 재현이 뛰어난 세트는 현대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대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과연, 첨단 액션과 화끈 멜로에 익숙해진 요즘 관객의 가슴에 파고들지는 미지수다.
한편 기대했던 신중현의 음악도 영화 속에서 배어나지 못한 아쉬움까지 남게 한다.
코리아필름 객원기자 조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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