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詩처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 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멀리 희미한 빛,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데 방향 없이 무작정 걷는다. 언젠가, 혹은 지금도 지나고 있을 외롭고 고단한 터널. 그 어둠 속에서 불안한 심장들과 동행했던 詩, 오랜 만에 꺼내 본다. 한편의 시는 참으로 신기해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침전물을 남긴다. 내 안에 가라앉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때로는 멀리 달아나 있고 때로는 아직도 그곳에 머물러 불안을 줍고 있다. 내 성장의 깊이를 가늠해 주는 시를 펼치듯,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문득 다시 꺼내보고 싶은 영화 한편을 만난다.

한 남자가 있다. 단 하나의 표정만으로도 청춘의 불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얼굴. 그는 이제 막 실연을 당했다. 유부남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연인의 고백이 있었다. ‘없던 일’로 해보려 했지만, 우연은 그를 다시 ‘있던 일’로 돌려 놓는다. 남자는 헤어진 연인을 찾는 대신, 그녀를 사로잡았던 유부남에게 접근한다. 무언가를 계획하고 한 일은 아니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그것은 남자가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뜻밖에도 연적은 종잡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인생의 남은 목표가 로맨스라고 말하는 중년의 얼굴. 아직 그에 대한 태도는 정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솔직하고 대담한 그녀는 남자의 청춘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사랑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문제의 유부남이 남자를 방해한다. 이제 남자가 연적에게 취할 태도는 분명해진다. 너무도 선명하게, 질투. 이제 그는 잠시 접어두었던 질투의 날을 다시 세운다. 이번에도 질 수는 없는 일이다. 남자에게 사랑은 모든 것이 된다. 때때로 그런 자신이 낯설지만 그 사랑에 주저없이 모든 것을 걸게 된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지 않은가. 사랑은 청춘의 모든 이유가 된다. 그것이 처음부터 빈집인 줄도 모르고… 그 안에 단 한번도 스스로를 들여놓아 본 적 없는 줄도 모르고…

세상에 그 상황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하나임을 보여주는 절묘한 시어(詩語)처럼, 간결하고 평범하지만 나무랄 데 없이 정확한 대사는 이 영화의 힘이다. 때로는 너무 솔직해서 ‘키득’ 웃음이 난다. (“누나,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 꼭 자야 된다면 나랑 자요… 나도 잘 해요.”) 때로는 너무 대담해서 ‘쿡’ 웃음이 난다. (“이제 여관가요… 갑자기 누가 한 말이 생각났는데 반대로 하고 싶어요.”) 때로는 너무 태연해서 ‘피식’ 웃음이 난다. (“아내한테도 잘 하고 애인한테도 잘 하면 돼지. 마누라한테도 못 하고 바람도 못 피는 인간들보다 백배 낫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문장이 아니라, 등장인물 본인들조차 모르게 저절로 나오고 듯 밀착된 대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되새김질하게 된다. 이 영화의 대사가 갖는 힘은, 가장 긴장된 순간의 정점을 마련하는 것이 단 하나의 문장이라는 데서 확인된다. 살아있는 대사는 살아있는 캐릭터로부터 나온다. 때문에 다시, 이 영화의 힘은 정확한 캐릭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근래 들어 만난 중에 가장 매력적인 인물들이 모였다. 희망마저도 불안이 되는 이십대의 얼굴, 어느 쪽이든 심각할 것이 없는 삼십대의 얼굴,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십대의 얼굴…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닮았고 또 누군가를 닮아 보인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저절로 정이 간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힘은, 말 그대로 ‘질투의 힘’이다. 인물들의 평범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삼각 관계에서 비롯되는 긴장감. 그것은 낮게 가라앉아 흐르다가, 어딘가에서 저릿한 통증을 유발한다. 모두가 선택권 없이 세상에 나왔듯이, 애초에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없다. 하여, 우리는 가질 수 없는 모든 존재에 질투를 느낀다. 다만 시기마다 질투의 내용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유일한 위안일 뿐. 영화 속에서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의 질투로 애가 탄다. 때로는 증오로, 때로는 무관심으로, 때로는 체념으로, 때로는 집착으로 옷을 바꿔 입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질투의 힘. 그 불편한 에너지를 감지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주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시작된다.

<윤사월>이란 드라마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랑이 뭐야? 그게 뭐 길래, 그렇게 요란하게 여러 사람 괴롭히면서 하는 거냐구? …미련, 오기, 복수, 증오, 질투… 세상에서 제일 치사하고 더러운 감정들이 다 모이면, 그게 사랑이야…” 은희경의 <빈처>에서 아내의 일기장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있다. “누군가를 애태우고 싶다. 누군가로 인해 애타고 싶다.” 그렇다. 우리는 치사하고 더럽지만 얼마든지 애타고 싶다. 계속 질투하고 싶다.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편의 시집처럼 내 방 책장 속에 간직해 두고 싶은 영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간 뒤에, 다시 꺼내어 보게 될 것 같다. 그때 난 무엇을 보게 될까… 그저, 언제라도 아직 끝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언젠가는 나를 사랑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코리아필름 명예기자 황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