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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하지 않은 공포
여고를 둘러싼 괴담은 끝이 없다. 노골적인 차별이 학습되는 교실에서, 꽃 같은 목숨이 던져지는
옥상에서, 뒤틀린 욕망을 차례로 밟고 올라서는 계단에서… 단순한 연작이 아니라, 늘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거듭나는 여고괴담 시리즈는 한여름 공포 시장에서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특별 상품이다.
탄탄한 스토리 안에서 학교 폭력과 공포의 조합에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전율을 선사했던 <여고괴담>을
시작으로, 독특한 비주얼과 함께 소녀들의 예민한 감수성에 집단 주술을 걸며 정서적인 공포를 만들어
냈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Momento Mori>에 이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라는
주문과 ‘계단괴담’이 합성된 오싹한 설정으로 찾아온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또 하나의 새로움과 한 계단 올라선 공포를 만날 수 있다…고, 당연히, 기대했다. 하지만…
간절히 소원을 빌면 29번째의 계단으로 변하면서 그 소원을 이뤄준다는 28개의 층계로 된‘여우계단’이
있다. 그리고 그 계단은 예술고등학교 안에 있다. 이 설정이 의미심장하다. 외모의 아름다움과
재능의 완벽함을 추구해야 하는 예고생들의 욕망은 보다 직접적이며 보다 끈질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위해 다른 가치를 냉정히 재단해야하는 예고생들의 왜곡된 욕망과 절망이,
28개의 계단 위에서 또 하나의 계단을 딛고 올라서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설정만큼 절실하지
않다. 인물은 흔히 짐작할 수 있을 만큼만 욕망하고, 또 그만큼 익숙한 강도로 절망한다. 토슈즈가
닳도록 연습을 해도 늘 2등인 진성(송지효), 사랑하는 발레보다도 진성이가 소중한 소희(박한별),
육중한 살을 빼서 소희처럼 예뻐지고 싶은 혜주(조안),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조각을 만들고 싶어하는
윤지(박지연). 이들 네명의 내면을 개연성있게 포착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관객들이 인물들의 욕망과
절망과 공포에 동참하는 것을 방해받는다. 진성의 뒤틀린 욕망을 시작으로 네 소녀의 소원이 파국으로
치닫는 순간에도 인물들은 줄이 부족한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거칠게 붙여진 조각상처럼 불편하게
다가온다. 인물들의 분노가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으며, 공포 역시 남의 일처럼 관조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여고괴담 시리즈’의 힘인지,
‘여우계단’의 힘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가장 빛나고 아름다워야 할 시절에 안팎으로
억압받고 있는 소녀들의 정서가 여전한 울림을 준다는 사실이다. ‘여우계단’의 29번째 계단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높이다. 그 불행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소녀들 자체가 슬픈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유리조각이 들어있는 토슈즈를 신은 발이 비현실적인 각도로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딛고 있다. 분홍빛 토슈즈에 스며드는 붉은 선혈. 떨리는 목소리로 계단을 세며 여우계단을 한발
한발 올라서고 있다. 마른 발목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망설임. 그것만으로도, 우리네 심장에 유리조각이
박힌다. 소녀들의 창백한 얼굴에 핏빛 미소가 그려질 때, 내 심장의 유리 파편도 가늘게 부서졌다.
하지만 공포 영화가 새롭게 무섭지 않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 아닌가. 새로운 공포는 관객과의
심리전에서 이겨야만 만족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우계단>은 냉정하게 자아비판을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시리즈에서 ‘세 번째’는 그만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코리아필름
객원기자 황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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