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트 홈, 바람 잘 날 없어라.

호랑이 가족 먹던 시절

「호랑이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서 내 가족을 하나 둘 잡아먹고 있다. 마지막 다리를 뜯어 먹고 나를 향해 빙그레 웃는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디선가 읽은 기막힌 탄식이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호랑이냐고 묻지는 말자. 마주 앉은 호랑이가 나인지, 마주 앉은 내가 호랑이인지도 묻지는 말자. 바야흐로 호랑이는 가족을 잡아먹고, 나는 차마 말릴 수도 없는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도대체, 가족이 뭐길래…?

바람부는 날엔 어디로 가야 하나

즐거운 우리 집, 스위트 홈이 있다. 지성 충분하고 개성 과하신 아버지, 이성 충분하고 감성 과하신 어머니, 명예 충분하고 욕망 과하신 남편, 매력 충분하고 고독 과하신 아내, 그리고 스위트 홈으로 초대(입양)된 아들. 변호사 남편에 무용수 출신 아내, 이 얼마나 훌륭한 이성과 감성의 조화인가. 하지만 그 조화가 요상한 조화를 부리기 시작하니, 그 이름도 아름다운 중산층 가정에 바람이 불다.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그 대단한 가족의 구성원을 보자.

(♂) 아버지 (김인문) : 난 나대로 살다 갈테니, 넌 너대로 살다 와.
그는 일말의 반성도 없다. 반성해도 자신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부성의 초상. 그나마 최선은 독야청청 홀로 사라지는 것.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로 살다 가지만, 다음 타자인 아들에겐 굳이 자신을 따를 필요 없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병들어 버린 아버지의 간은 자기 세대를 정화하지 못하고 죽어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토해내는 더러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그 피는 아들의 정면에 튀기고 만다. 씻어낸다고 그 피가 지워질까. 지워진대도 피의 온기까지 잊혀질까. 과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 그는 과제만 남겨놓고 떠나간다.

(♀) 어머니 (윤호정) : 사람 솔직히 살아야 되는 거더라.
그녀는 적극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이다. 남은 생의 절정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모은다. 앞 뒤 보지 않는다. 심지어 죽어가는 영감 앞에서까지 미련없이 이기적이다. 인생의 8할을 솔직하게 살지 못한 그녀는 남은 2할에 못 다핀 꽃을 피우려 한다. 그녀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차마 실행하지 못한 행복추구권을 온몸으로 쟁취한다. 당연한 권리인데, 양보하고 살다가 뒤늦게 찾으려 하니 이기적이란 소릴 듣는다. 그녀는 기꺼이 나쁜 엄마, 나쁜 여자가 된다. 몇 발자국만 더 떼면 여지없이 인생이란 절벽에서 줄 없는 번지점프를 해야 하는데, 못 낼 용기가 어디 있을까. 그녀가 고백하는 생에 최초의 오르가즘은 최초의 자기표현에서 오는 100% 전율일 것이다. 아직 이 땅은 그녀의 오르가슴을 소화하지 못한다. 그녀는 미련없이 다른 땅을 찾아 간다.

(♂) 남편 (황정민) : 내가 지금 바람 좀 핀다고 너한테 미안할 건 또 뭐냐.
이 남자 참 뻔뻔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자, 아내의 남편이며, 아들의 아버지인 그는 1인 3역으로도 모자라 한 여자의 애인을 자처한다. 어디 그 뿐이랴. 이 나라의 국민이자, 법조계의 변호인이자,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증인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의무를 한꺼번에 올려놓기에 그의 어깨는 너무 좁다. 그렇다고 다 내려놓고 자유인으로서 권리를 주장하기에 그는 유전적으로 새가슴이다. 그걸 들킬까봐, 뻔뻔함이라는 위장술을 고집한다. ‘째째하게 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는 대단한 아내 덕에, 그의 바람에 죄책감 따위는 실리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자처한 일이 바람을 가장한 태풍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너무 뒤의 일이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다는데 그의 뒷모습은 영락없이 아비를 닮았다. 그래도 홀로 남은 그가 그리 불쌍하지는 않다. 오히려 기분 좋게 가벼워 보인다.

(♀) 아내 (문소리) : 니 인생이나 똑바로 살아. 당신 아웃이야.
이 여자 참 당당하다. 시아버지가 토해낸 피를 닦아내고, 생의 오르가즘을 노래하는 시어머니 응원하고, 혼자만의 섹스를 끝낸 남편 옆에서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가슴으로 낳았다는 아들의 가슴을 쫙 펴주는 여자. 남성과 여성이 만나 결혼하였으나, 남성이 남편으로 자리 이동을 함과 동시에 여성에서 아내로 살아가다가 중성이 되어버린 여자. 남편이 자신의 남성을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떠돌 때, 자신의 여성을 구걸하느니 춤을 추거나 음악을 듣거나 스트래칭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등산을 하는 여자. 옆집 사는 고딩의 충만된 호기심을 교육적(!)으로 대처해 주며 솔직한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 여자. 항간에는 그녀의 쿨함을 두고 ‘진짜 쿨’이냐, ‘가짜 쿨’이냐로 논란이 일고 있다는데,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쿨함의 정의를 뛰어 넘어 오랜만에 만나보는 새로운 캐릭터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영화 라스트에서 그녀는 아웃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아웃 시킨다. 한국 영화의 분명한 성장이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바람난 가족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집단적이라 해도 바람은 어차피 지나가는 것? 바람은 불었어도 본래 그 자리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아니다. <바람난 가족>은 강요된 귀소본능을 거부하면서 또 한번의 진화를 입증한다.

가족 제거 수술

조경란의 소설을 보면, 사람들은 굳은살이나 사마귀, 겨드랑이털처럼 가족을 달고 다닌다. 아무리 자르고 잘라도 다시 생겨나는 것,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가족의 실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젠 누구도 굳은살이든 사마귀든 겨드랑이털이든 꾸역꾸역 달고 다니지 않는다. 어렵지 않게 굳은살 제거 수술을 받을 수 있고, 사마귀도 레이저 한방이면 흔적없이 사라지고, 겨드랑이털 역시나 영구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을 달고 다니는 세대가 아니다. 설혹, 제 살 잘라내는 격이더라도 가족 제거 수술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부작용에 대한 공포로 그들을 붙잡을 수는 없다.

관성의 불행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한다. 하지만 관성의 법칙에 충실한 나머지, 가족 윤리는 고리짝 시절부터 언제나 부동자세다. 급히 출발하거나 급히 멈출 때 휘청이듯이, 정체된 가족은 이 시대 안에서 호되게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왜 가족 윤리는 유연한 움직임을 거부하는가. 왜 흔들리는 세상에서 똑바로 서 있기만을 강요하는가. 왜 되풀이되는 불행을 방관하는가.

오픈 유어 아이즈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고. 이런 가족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냥 솔직해지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스위트 홈의 단맛에 얼마나 많은 불행이 묻혀야, 비로소 솔직해 질 수 있을까. 이미 오래 전 눈 앞에 현실이 다가왔는데, 눈 딱 감고 부정하는 꼴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현실에게 잡아먹힌 뒤 일 텐데… 텅빈 집안에 뜬금없는 호랑이 한 마리가 포만감으로 빙그레 웃고 있을텐데… 행복에 집착할수록 행복에서 멀어지고 있는 당신의 눈을 응시하며, 더 늦기 전에 현실을 똑바로 보자고, 좀 더 솔직해지자고, 진짜 행복해지자고 말하는 영화! 쓰지만 약이 될 영화! 필히 남편이랑 같이 복용하자. 그리고 난 뒤, 서로의 눈을 오랫동안 응시해보자.

코리아필름 객원기자 황다은

붕괴되어 가는 중산층 가정의 실체를 진지함과 가벼움을 적절히 섞어 풀어내...

영화 <바람난 가족>은 변호사 남편 영작과 그의 아내 호정 그리고 영작의 친모 등 가족 모두가 바람을 피우는 이야기로 ‘바람’이라는 쉽지 않은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내세워 점점 개인화 되고 해체되어가고 있는 우리시대 중산층 가정의 실체를 진지함과 가벼움을 적절히 섞어 풀어낸 영화이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명연기를 선보인 바 있는 문소리가 파격적인 노출씬도 마다하지 않은 열연이 돋보이며 황정민, 봉태규, 윤여정, 김인문, 성지루 등 조연들의 맛깔스런 연기도 볼 만하다. 무엇보다 <바람난 가족>은 바람난 영작과 호정이 결국 이혼으로 치닫게 되지만 단순히 '불륜'이라고 치부되는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을 탈피해 개인의 솔직하고 행복한 삶에 주안점을 두고 밝고 경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반면, '바람'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접근함에 있어 진중함이 떨어져 큰 여운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30대 관객층에게 공감과 호응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며 최근 화제가 된 MBC 미니시리즈 '옥탑방 고양이'에 출연한 봉태규의 유명세로 인해 기대 이상의 흥행이 예상된다. 장기 흥행은 미지수. 한편, 극중 호정과 지운의 극장 데이트 씬에 임상수 감독의 전작 <눈물>과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이 깜짝 상영된다.

고착된 가족 관념에 새로운 반향을 불러일으킬 영화 <바람난 가족>은 오는 8월 14일 개봉예정이며 청어람에서 배급한다.

코리아필름 김철연 기자

아쉽기만 한 통렬함

제목부터 보시라. 이토록 직접적으로 한 영화를 표현했던 제목이 있었던가. 제목 그대로 온 가족이 바람을 피워댄다. 젊은 여류사진작가와 밤낮 가리지 않는 정사를 즐기는 남편 영작, 옆집 10대 문제아에게 몸을 내주는 아내 호정, 그리고 초등학교 동창과의 섹스에서 생전 처음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어머니 병한 까지. 이렇게 온 가족에게 불어온 바람을 통해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가정의 속사정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영화에서 제목부터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람'은 속부터 곪아버린 평범한 한 가정의 소리 없는 해체와 붕괴를 보여주는 적절한 도구라고 할 수 있겠다. 한 가정 내의 장년, 노년에 가릴 것 없이 피워대는 바람을 통해 가족에 대한 환타지를 무참히 깨부순다. 통렬하다 못해 무시무시할 정도다. 가족에 대한 가식적인 울타리 대신에 지나치게 '쿨'한 관계만 있을 뿐이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순간에도 별 반응 없이 '잘 지내 보라'라고 무심히 말하는 호정의 태도뿐 아니라 고등학생과 바람이 난 아내를 대하는 영작의 태도 역시 그러하다. '바람난 가족'은 가식적이진 않지만 지나치게 '쿨'한 비현실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위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것과는 다르게 전형적인 가부장적 틀 속에 갇혀 사는 듯한 영작과 춤을 추는 자신의 몸놀림처럼 자유롭기만 한 호정의 의식적 대립과 언제부턴가 아무렇지도 않게 식어버린 사랑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이를 낳지 않고 수인을 입양하게된 이유는...?
영화는 이 가족의 본모습을 발칙할 정도로 잘 인식하고 있지만 이 가족의 구성원들 각각의 심적 고통이나 그 고통의 연유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랑해 주고 보호해 주어야할 가족은 결국 상처받고 곪아 터져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한 가족의 해체와 붕괴의 과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표현했지만 정말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왜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것일까 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와 그 해답의 제시가 없어 아쉽다.

코리아필름 명예기자 김민영